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이스그라이츠 공령 (문단 편집) == 왕사(王史) == 로이스 공가는 모든 남자 구성원이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썼다. 로이스-그라이츠의 경우에는 100세까지 모두 채워지면 다시 1세부터 시작하기로 했으나, 24세를 끝으로 단절되었다. * 하인리히 11세 (1778-1800) * 하인리히 13세 (1800-1817) 1747~1817. 신성 로마 제국 [[요제프 2세]]의 절친이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의 장군으로 활약했다. 1807년 [[라인 동맹]]을 거쳐 [[독일 연방]]에 가입. [[빈 회의]]에선 [[작센 왕국]]으로부터 땅을 조금 뜯어낸다. * 하인리히 19세 (1817-1836) 1790~1836. 딸 둘만 두었던 탓에([[살리카법]]) 공위는 동생이 이어받는다.[* 장녀 루이제 카롤리네는 [[작센알텐부르크 공국|작센알텐부르크]] 공자 에두아르트(초대 공작 프리드리히의 7남)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다가 사별하고 [[로이스게라 공령|로이스게라]] 공가의 방계 가문인 로이스쾨스트리츠 가문의 하인리히 4세와 재혼해 1남 3녀를 두었는데, 하인리히 4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증손자 하인리히 14세가 현재 로이스 공가의 수장을 맡고 있다.] * 하인리히 20세 (1836-1859) 1794~1859. [[1848년 혁명]] 이후 헌법을 제정은 했으나 실제 시행은 않았다.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. * 하인리히 22세 (1859-1902) 1846~1902. 나이가 어려 21세가 될 때까지 모비인 헤센홈부르크의 카롤리네가 섭정했다. 카롤리네는 반[[프로이센]]파였으며 그 때문에 [[프로이센-오스트리아 전쟁]] 때 프로이센군에 게라가 점령되었고 10만 탈레르를 배상해야 했다. 1867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헌법을 도입했다. 하인리히 22세도 부모처럼 반프로이센 시각을 견지했고, 보불전쟁의 승리 축하, [[빌헬름 1세]]와 [[프리드리히 3세]]에 대한 추모, [[오토 폰 비스마르크|비스마르크]]의 [[문화투쟁]]과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모두 반대했고 [[의화단 운동]] 파병도 반대했다. 별명은 장난꾸러기 하인리히(Heinrich der Unartige). 4녀 헤르미네는 [[빌헬름 2세]]의 후처가 되었다. * 하인리히 24세 (1902-1918) 1878~1927. 어릴 적의 사고로 정신과 육체 모두 온전하지 않아 [[로이스게라 공령]]의 제후들이 섭정했다. 미혼이었으며 그가 사망함에 따라, 로이스-그라이츠 계통은 단절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